내고향웅천내음

[스크랩] 제포(제덕)성의 위용

아지사리 2010. 3. 24. 11:27
 
제포성지를 처음 찾아 갔을 때에는 웅천읍성을 현장취채하러 갔다가 들러 본 것이 처음이었고 제포성지에 관해서도 그곳에 적혀 있는 현장설명문으로 알았었다. 또 위치를 몰라서 정확히 제포성지에 관하여 사진도 찍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제포성지 취재는 공부 한 것을 가지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일단 성곽을 찾지를 못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겨우 찾아서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포성을 만든 배경은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1437년) 합포에 있던 해군기지를 제포로 옮겼다라고 했다. 그 후 (1485)에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1486년)에 완성하였다. 그럼 합포에 있던 수군기지를 왜 옮겼을까? 세종18년 (1436년) 제포를 개항한 후 왜인들의 불법이주를 막기 위해서라고 적혀있었다. 이곳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진해박물관에 있는 제포에 관련된 미니어처를 보자.

 
 
▼ 세종때 삼포를 개항하면서 삼포란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 지금의 경남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熊川)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方魚津)과 장생포(長生浦)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 염포(鹽浦) 등을 말한다.

 

▼  삼포를 개항한 이래 일본인들의 무역·거류가 허가되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다.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교만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제정(諸政)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왜관을 두어 그들의 교역·접대 장소로 하는 한편, 여러 차례 그들의 귀환을 요구하고 통제에 부심하였다.

 

▼  아래 사진은 제포성에 대한 미니어처입니다. 

 

▼  제포성과 제포왜관이 있었던 곳은 직선거리로 1km가 되지 않습니다.

 

▼  사진 좌측이 제포성이고 우측이 제포왜관입니다. 보시기에도 상당히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제포성의 성곽을 나타낸 것입니다. 아래사진에 보이는 산 정상부분은 지금 복원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왜관에 거주하면서 생기는 문제 그리고 수출입 품목에 대한 통제들이 필요할 수 빡에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합포에 있던 수군기지를 제포 바로 앞으로 옮겨와서 성을 만든 이유였습니다. 또 삼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곳이 바로 제포입니다. 제포성은 일종의 세관의 기능과 함께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왜관이 있었던 제포에서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  처음 30호로 시작한 제포의 인구는 성종 때 들어서 347 가구 2천5백명으로 늘어난다. 왜인물품의 대가로 지급되는 면포가 크게 늘어나 국가재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수도18, 경작지8 그런 위협은 왜인이 토지를 점유하게 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제포의 왜인들은 제포해안에서 가까운 수도를 비롯해 주변의 전답을 사들이려 애를 쓴다. 가난한 조선인들은 왜인들의 고리대를 쓴 대가로 그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지금의 일본계 고리대금업자들이 판치는것 과  비슷하네요.



▼  현재 제포의 모습입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수출입항과 비교하면 너무나 조용한 어촌입니다. 제포 뒤에 있는 산 바로 뒤가 웅천왜성이 있는 곳입니다.

 

▼ 마주보이는 야산과 마을이 그 옛날 제포였고 지금은 제덕동입니다.

 

▼ 포구에서 삼포방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삼포를 지나면 사화랑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진해해양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조선소업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립하기전에는 목책들이 많이 있었고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목책의 기능은 포구로 출입하는 배의 통행을 제한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세관선이 와서 일일이 검사를 하기위해 목책을 못넘어오게 한것이 아닌가 생가합니다. 

 
▼ 삼포무역의 규모는 점점 거대해져 갔습니다. 조선으로서는 무역량을 비롯한 제반사항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겠죠. 세종 25년인 1443년 만들어진 계해약조는 삼포의 무역수준을 정한 최초의 규정이다. 지금 남아있는 내용은 두가지 뿐이지만 이것을 통해 당시 삼포에서 거래되던 무역의 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무역량 배 씨지30 삼포의 설립자인 세종은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정확히 제한했지만 그것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처음규정에서 50척으로 정해졌던 세견선의 수가 세조때는 400척에 이르렀다. 삼포의 급격한 팽창으로 경제적 부담을 느낀 조선은 여러 가지 억제책을 쓰게되었습니다. 덕분에 세견선의 수는 많이 줄었으나 성종 초에 가면 다시 220척으로 늘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삼포의 영향력은 커져가고 있었다. 일본 뿐 아니라 저 멀리 남방의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까지. 삼포는 어느새 남쪽의 문물이 풍성하게 오가는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 조선시대에는 왜관 출입은 엄격히 금지 시켰다고 합니다. 왜인들은 돈없는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비싼이자를 붙혀서 먹고살았다고 하더군요. 그것 때문에 땅을 경작하여 왜인에게 받쳤다고 합니다. 



▼ 제포에서 지금의 불모산방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불모산은 산세가 높아서 진해,김해,마산,창원,함안에서도 잘보이는 산으로 봉수대가 있었던 곳입니다.

 

▼ 1593년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이 웅포해전을 치루면서 도무지 적들이 웅포에서 나오지를 않아서 3월24일 삼혜와 의농 두 승병장과 의병장 승응지를 웅포왜성서측인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는 척하게 하게 했던 곳이 제포입니다.

 

▼ 괴정마을은 왜인들이 살았다 해서, 정식 이름 말고도 왜리란 별명을 하나 더 갖고 있다고 합니다.

 

▼ 우측에 보이는 제포낚시만이 이곳이 제포라는 느낌을 줍니다.

 

▼ 이곳에는 바다낚시꾼들 상대로 영업하는 사람들과 어부들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 제포성에서 제포바다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얼마전에 바다를 매립하였습니다. 보시는 땅들은 모두 바다였다고 봐야 합니다.

 

▼ 1505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사회정화 운동을 편다. 문제많은 삼포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었다. 중종의 삼포억제책은 삼포왜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1508년 11월 2일. 제포 근처의 가덕도(지금의 부산시 가덕도)에서 조선사람이 피살됩니다. (세계1차대전도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 부처를 살해하면서 일어났는데 전쟁의 원인은 비슷합니다.) 1509년 3월 20일, 전라도 보길도에서 제주도 공마 수송선이 습격당한다. 일련의 사건으로 항거왜인에 대한 억압이 더욱 심해지자 삼포왜인들이 대마도와 연결하여 난을 계획합니다. 1510년 4월 4일 삼포왜란 발발하게 되는데....
아래 사진은 진해 박물관에 있는 웅천성 미니어처입니다. 

 
웅천성이 함락되고 조선인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800여호가 불탔습니다. 4월 19일, 조선진정군의 총공격으로 웅천성이 탈환됩니다. 300여명의 왜군이 참살되고 삼포왜란은 보름만에 진압됩니다. 왜란진압은 곧 삼포폐쇄로 이어졌다. 조선정부는 1407년 이래 100년남짓 운영되어온 무역항 삼포의 문을 닫고 대마도와의 단교를 선언합니다. 조선이 일본과의 국교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 1545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 1592년입니다.  50여년이 되기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것 입니다.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천지차이로 달라졌습니다. 조선을 떠난 일본은 동남아 일대를 누비며 서양의 총을 받아들여 막강한 군사력을 키웠고, 조선은 삼포의 문을 닫은 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과 귀를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웅천은 어떤 곳인가. 웅천은 제포에서 내륙으로 가는 주요길목으로서 일본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사신들은 반드시 한성을 찾아와서 임금을 찾아서 조공무역의 형식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남아 있는 웅천읍성 동쪽 성곽


▼ 그것은 삼포를 통해 이뤄지는 모든 무역에서 조선이 주도권을 쥐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보다 조선이 상국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제포성의 흔적을 찾아서가 이어 집니다.

 

▼ 지금 현재 제포성의 복원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 계속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포성은 조선시대때 관군들이 가장 선호했던 곳은 아니였을까요?

 

▼ 제포성지 우측면에 보면 회랑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습니다. 회랑이 맞을 것입니다.



▼ 제포성의 동쪽면으로 성곽의 자국만 남아있습니다.



▼ 제포성의 중요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터



▼ 내용은 잘 모르는 공적비같은 비석이 있습니다.



▼ 동쪽과 북쪽의 성곽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만난 성곽의 흔적들



▼ 여기저기 늘려져 있습니다.



▼ 아까와 마찬가지로 회랑입니다. 상당히 깊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회랑으로 보는 이유는 우측에 위에서 보는 큰 돌들이 있습니다. 이돌은 성곽을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기때문에 이곳이 회랑으로 추정하는 이유입니다. 



▼  그럼 삼포중에서 제포가 가장왕성했던 이유가 어떤 이유였을까요? 그것도 불과 1km안에 성곽을 두개나 만든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  다음편에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도자기였을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왜냐하면 이곳 제포성지에서 불과 10km안에 웅천도요지가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많은 도공들을 잡아갔는데 도공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웅천도요지에 있었던 도공들입니다.



▼ 제포성지의 회랑



▼ 제포성지의 회랑입니다. 그냥 계곡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유는 이산은 너무 낮습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산을 판 흔적이 보입니다.



▼ 제포성지 서쪽면에 있는 성곽입니다.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쓰레기와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지점은 제포성의 남쪽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이 안된 부분이 상당히 있고 서쪽면은 이런식으로 방치가 되고 있습니다.



▼ 가까이 가보았지만 나무들과 함께 엉켜있어서 잘 구별이 안가고 있습니다.



▼ 서쪽면은 사화랑봉수대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사화랑은 웅포해전때 이순신장군이 회항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편에는 제포성지와 웅천읍성 그리고 찻사발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웅천초등학교59회
글쓴이 : 배권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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