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웅천교회전경입니다.
웅천교회전경
주기철목사님기념비

김해공항에 내리니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다.부산의 바닷바람이 신선하여 기분이 아주 좋았으며 ,김해공항을 빠져나와서 진해방향으로 달리기를 40분정도 하니 웅천이 나왔다.웅천초등학교 골목으로 들어와 웅천교회에 들어서니, 미리 전화를 받으신 노성한목사께서 반가히 맞아 주셔서, 차를 마시면서 웅천교회의 역사와 순교자 주기철목사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교회내에 마련된 작은 역사관에 가서 웅천교회의 역사를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게 다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어 좋았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교회이며 경남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들은 호주 장로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개척된 교회들이다.
그리고 웅천교회의 마당에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하시고 이 때문에 평양에서 순교를 하신 주기철목사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한국교회의 신사참배투쟁사는 주기철목사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전국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번져나갔고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목사의 저항과 순교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곳을 방문한 오늘 4월21일이 마침 주기철목사 순교기념일이라 답사의 의미가 참 큰 하루였다.
노성한목사의 안내로 웅천교회에서 가까운 생가터(진해시 웅천1동 백일리)를 가보니 아름다운 산골에 있던 생가는 없어지고 집을 둘러싼 대나무밭과 돌담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 터는 불신자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주기철목사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1897년 11월25일 주현성장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서 8세에 사립인 개통소학교(현 웅천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12월25일 13살의 나이에 웅천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게 된다.
주기철목사의 본래 이름은 주기복이었는데 13살의 나이에 교회에 나와서, 16세의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기철로 바꾸게 된다.그 의미는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는 뜻이라고 했다니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의 순교신앙은 바로 웅천교회에서 싹이 튼 것이며, 정주의 오산학교를 거쳐서 서울의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다가 안질이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웅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초량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을 하여 교회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부흥을 시켰으며, 1931년 7월에 마산의 문창교회에 부임을 하셨다.
특히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통과를 시키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부산일보가 대서특필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주기철목사는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여 1938년 2월8일에 새로운 교회를 헌당하기 직전 일제에 구속되었다.그후에 4차례의 옥고로 7년간 고난을 겪다가 1944년 4월21일오후9시에 평양감옥에서 한국교회의 순교의 제물이 되신분이다.
찾아가기:부산에서 하단,녹산방향으로 진해를 가다가 웅천면에서 웅천초등학교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농협을 끼고 들어가면 웅천교회가 있다.전화(055-546-1026)
주소 : 경상남도 진해시 성내동 384-4
전화 : 055-54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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