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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권분쟁 연구 | |||||||||
김경호 불교정보전략 연구실 연구실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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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에 다툼과 대립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상황을 보는 입장과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때로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서로 대립될 수도 있다. 종단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향’할 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영역’에 속해 있기에 대립과 갈등은 밥먹고 숨쉬는 일처럼 당연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이 상식을 뛰어넘고, 내지는 세인들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면 당연히 문제가 된다. ‘인천(人天)의 사표(師表)’인 스님들의 행동이 긍정적인 모범이 되지 못하고 지탄과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분쟁’이 되는 이유는 ‘분쟁’의 원인이 추악한 ‘이권’과 ‘세력다툼’이고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된다는 데 있다.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면 중생들은 당연히 비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권 분쟁’의 다음과 같은 면을 주목하고자 한다.
2. 폭력을 수반한 분쟁에 주목한다.폭력적인 방법으로 총무원을 접수하려는 시도만이 아니라 사찰 접수과정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폭력도 ‘종권분쟁’의 한 유형으로 파악된다. 그 까닭은 ‘폭력’이야말로 불교계의 분쟁이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며, 사찰을 놓고 벌이는 공방의 총화가 종권분쟁이라는 중앙권력다툼으로 현상화되기 때문이다. 3..이권을 둘러싼 분쟁에 주목한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울지라도 분쟁의 배경에 이권이 놓여있다면 감추어지지 않는다. 폭력과 더불어 지탄받는 2대 주제이기 때문에 거론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든 이권 분쟁은 종단 권력의 총화인 ‘종권 분쟁’으로 발전하고 수렴된다. 이러한 시각으로 조계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단 한 해도 종권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권분쟁과 관련한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권분쟁의 전사 ‘불교 정화’ 조계종단의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단 출범 전사(前史)인 50년대의 이른바 ‘불교정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조계종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전개되어 비구측의 대처승측 사찰 접수로 진행되었다.(때문에 불교정화라는 용어보다는 사찰정화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또 이때 밀려난 대처측에서는 이것을 ‘법난(法難)’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의 정화 유시도 모 사찰을 방문하던 중 절 경내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내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1) 불교정화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구 대처 분규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과의 밀착, 삼보정재 탕진, 무자격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는 등 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불교 정화의 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측이나 대처측 모두 정화과정은 처절한 생존권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비구측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통사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러나듯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조계종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성립한 것이다. 조계종이 명실상부하게 한국불교의 대표권을 확보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이다. 4·19혁명 후 이승만정권하에서 억압당했던(?) 대처측의 반격으로 불교 분규가 심각하게 재연되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불교 정화로 야기된 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 1월 18일 비구측과 대처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이어 1962년 3월 22일 문교부 주선으로 재건비상종회(대처측 불참)에서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조계종 종헌을 3월 25일에 공포하였다. ‘불교정화’의 구체적 진행과정은 사찰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것은 통합 종단으로 조계종이 성립한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형태를 달리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현대 한국불교가 기반하고 있는 경제적 토대가 사찰로 현상화되기 때문이다. 사찰을 장악하는 것은 명분과 공간을 확보함은 물론 사찰이 보유한 경제력과 사찰에 헌납되는 보시금, 입장료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종교집단으로서 조계종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즉 불교정화의 전 과정을 통해 승리의 관건은 명분도, 신도 대중의 지지도 아닌 원초적 폭력을 동반한 승려의 동원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또한 정부권력의 묵인, 방조 내지는 적극적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조계종을 일군 ‘불교정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각이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불교는 이처럼 계속되는 宗權鬪爭, 財産分爭 등을 내외적으로 노출시켰으며, 정화운동 자체가 신앙적인 종교운동의 패턴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권력 지향적인 방법으로 이뤄짐으로써 자주적 역량의 마비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3) 이것은 출세간의 도덕적·윤리적 행위가 아닌 가장 세속적이며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뿐만 아니라 불교재산의 엄청난 망실, 불교에 대한 불신감, 승려자질 저하, 사회교화·사회복지·교육사업 등의 정체 및 정권에의 예속 심화를 가져왔고, 게다가 분종이라는 갈라서기 결말로써 그후 수많은 종파들이 난립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한국불교의 특징을 낳게 되었다.4) 2) 60년대의 종권 분쟁 종단 출범 후 70년까지는 비구와 대처 싸움이 송사와 사찰접수 시도 등으로 지속되며, 통합 종단 내에서는 종정과 총무원장 간의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다. 이들 대립 중에서 비구와 대처 간의 대립은 1970년 대처측이 분종을 선언하면서 종단 외적인 공방으로 바뀌고 조계종은 비구측이 온전히 장악한 채 내부 권력분쟁으로 양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최초 종헌에서는 종단의 모든 권력이 종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즉 종정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반면 총무원장은 종정 보좌에 불과했다.5) 이는 비구 대처 분규 와중에서 종정을 비구측이 맡기로 했기 때문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구측이 취한 방안이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구측의 한 개인이 종단이라는 거대 집단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이 방식에는 권력 소외층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약점은 종단 오너인 종정과 전문경영인적 권한 밖에 행사할 수 없는 총무원장 간의 갈등으로 곧 증명되었다. 67년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 간 대립 내분이 발생한다. ‘인사문제나 재산의 처분 등 종단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데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통합종단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된 청담 스님은 종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 하였고 손경산 총무원장 스님은 종정이 지나치게 실무를 장악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었다. 청담 스님은 손원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동국대학교 재단의 4천여 만 원의 재정손실 의혹을 들어 손원장의 사퇴를 주장했다. 결국 청담 스님의 사퇴로 경산 스님도 사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6) 청담 스님은 퇴진 후에도 ‘내부정화’를 강력히 제기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불교유신재건안’이 총무원측에 의해 거부되자 조계종 탈퇴를 선언하였고 이후 조계종은 청담 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과 손경산 스님 계열로 대립하게 되었다. 청담 스님은 비상종회를 통해 다시 원로원장으로 복귀하였고. 이후 봉은사 땅 매각 문제로 월산 총무원장이 사퇴하자 직접 총무원장을 맡아 종권을 행사하다가 1971년 입적하게 된다. 3) 70년대의 종권분쟁 청담 스님을 뒤이어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강석주 스님의 경우는 파벌색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실제 권력을 뒷받침할 세력이 없다는 점 때문에 1년여 만에 사퇴하게 된다. 종단의 주요 권력 축인 종정과 총무원장, 종회의 대립 속에서 1974년 이서옹 스님이 5대 종정으로 취임한 이후 1975년 총무원장을 퇴임시키며 종정중심제를 구축하게 된다.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는 다시 일단의 소외세력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자 했다. 이 결과 78년에는 종정측의 조계사와 종회측의 개운사 2개의 총무원으로 분열하는 극도의 혼란상을 3년간 지속하게 된다. 70년대는 또한 봉은사 부지 매각, 연주암 부지 매각 등 각종 토지처분과 관련한 사건은 물론 특별분담금 문제로 경남 보리암주지를 폭행하는 등 이권과 관련한 각종 물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해프닝은 75년 김대심 일파가 종정을 감금 폭행하고 종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4) 80년대의 종권분쟁 80년대는 개운사와 조계사 총무원의 분열이 종식되고 송월주총무원장이 취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 노력은 군화발로 전국 사찰을 짓밟은 신군부의 80. 10. 27 법난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송월주 총무원장은 사퇴를 강요받았다. 80. 11. 5 정화중흥회의 출범 이후 종헌을 개정하여 81년 1월 6일 개정종헌을 공포한다. 개정 종헌은 총무원장 중심제이며 종회는 원로원과 중앙종회의 양원제로, 사법기능의 호계위원회를 신설하여 3권 분립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후 실권이 없어진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보다는 종단 대표권자인 총무원장과 대의기구인 종회와의 대립이 80년대 대립의 축으로 기능하게 된다. 종회의장이 종회 때마다 바뀌고, 총무원장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한 강화를 꾀하다 성수, 법전, 황진경, 정초우, 다시 황진경 스님으로 계속 바뀌었다. 그 이면에는 전국 주요사찰의 예산을 총무원에서 조정, 승인하려는 ‘주요사찰예산조정’ 신설(65회 중앙종회, 81년 4월), ‘직영사찰관리법’(68회 종회, 불국사, 신흥사, 석굴암, 낙산사, 능인정사를 총무원 직할로 제정하여 본사와 대립) 등 재정과 인사권과 관련한 제세력 간의 알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단의 중앙권력 다툼은 83년 신흥사 살인사태로 파국에 이르게 된다. 83년 8월 6일 신임주지로 부임하기 위해 신흥사에 들어가던 전 총무원 규정부장 혜법 스님 일행 14명은 신임주지 부임을 반대하던 신흥사측의 습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지다툼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자 여론은 들끓고 당시 문화공보부는 속초시장을 신흥사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하고 불교계 정화를 요구했다. 83년 9월5일 조계사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운영회의가 설치되었으나 비상종단의 새 종헌안에 대해(종정을 상징적인 위치로 한정하고 총무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며, 본말사를 폐지하는 중앙집권제 제도개혁안) 성철 종정이 사퇴하고 원로회의에서 인준을 거부하는 등 원로 중진의 지지를 못 받아 1년여 만에 좌초하게 된다. 86. 8월 22일 오녹원 총무원장이 사퇴하고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선다. 이후 88년의 종헌안 개정은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94년 종단 개혁 때까지 서의현 총무원장의 독주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5) 90년대의 종권분쟁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6) 분쟁의 특징 조계종 종권분쟁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권위의 실종 2) 지루한 법정송사 3) 총무원 건물을 둘러싼 중세적 공방전 4) 폭력으로 쉽게 비화 5) 분쟁에 필요한 실제 동력은 비구승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은 남기신 가르침과 율장을 근거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평등한 공동체로 유지되었다. 상가(Sangha, 僧伽)라고 불리는 불교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평등한 권리와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대중공사(大衆公事), 혹은 산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라는 전통으로 근세까지 남아 있었다. 동시에 수행과 깨달음의 권위가 교단 내에 엄존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권력과 이해를 향한 다툼은 내부 구성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제어해 왔다. 이러한 민주적 전통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사찰령(寺刹令)으로 파괴되고 만다. 즉 전체 대중의 민주적 합의라는 전통 대신 주지 1인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고 주지 1인에 대한 승인권을 총독부가 쥠으로써 효과적으로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30본산제와 ‘주지 1인의 전횡’이라는 악습은 지금까지도 형태만 달리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계종은 불행하다.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내부적으로 존경할 만한 권위를 형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단의 출발부터 분쟁타협의 부산물이었다. 비구측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 급선무가 돼 방법에 대한 불교적(율장에 근거한) 성찰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 이러한 불행한 출발이 현재의 모순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전통을 말하는 한국불교에서 선지식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는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입적을 계기로 전 국민의 시선을 모았던 성철 종정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선적 깨달음의 절대화를 부르짖지만, 실제 검증되지 않은, 또한 검증될 수 없는 권위에 대한 대중적 냉소가 한 몫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권위의 부재를 제도와 법적 질서로 대치해야 하는 것이 조계종의 상황이다. 권위가 실종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천박한 이해관계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계종의 ‘신성(神聖)을 상징하며 종통(宗統)을 승계(承繼)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종헌 제19조)를 지닌 종정 스님을 살펴보자. 종정 자리 또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종정 추대문제로 내분이 발생한 90년 당시의 〈‘진흙밭의 개싸움’ 또 시작인가〉라는 제하의 불교기자협회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한편 종정 추대문제가 발단이 돼 현재 9개월째 접어들고 있는 조계종 사태의 양 당사자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며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세간의 여론은 그 어느 쪽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보다 ‘또 시작됐구나’ 하는 정도의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 50년대의 소위 ‘정화운동’을 제외하고 ‘61년 통합종단 이후 벌어진 조계종 분규의 양상을 익히 알고 있는 불자들이 그렇게 쉽게 분규의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그도 그럴 것이 62년부터 86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취임까지 24년간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으나 거의 대부분이 세간의 불자들이 이해할 만한 명분이 없는 승려들끼리의 자리다툼의 모습으로만 비쳐졌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30여 년 간 세간의 시선을 끌었던 굵직한 종단내 사건들이 결국은 단순한 종권, 주지권, 이권 다툼이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7)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는’ 종정 추대문제를 ‘진흙밭의 개싸움’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것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해야 하는 언론이기는 하지만 불교에 대한 애정과 신심을 가지고 있는 불교계의 기자들이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공공연할 정도로 조계종의 역사는 분쟁과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이 기사는 종단의 모든 사건이 ‘종권’ ‘주지권’ ‘이권다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한 몸이다. 주지 자리와 이권을 결정짓는 총체적 권력은 바로 ‘종권’이며 종권을 향한 무리수가 계속 두어지는 것은 종권을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실질적 효과가 주지 자리와 이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가사회가 자기 정화를 위해 취하는 노력이 구성원들에게조차 동의 받지 못하는 한심한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분쟁에서 승리한 측은 패배한 측에 대해 멸빈, 제적, 공권정지 등 중징계를 취하지만, 징계를 당하는 측은 이권다툼에서의 패배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여전히 자기 문중과 지역에서 활보하며, 뒷전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금 화해하며 새로운 분쟁을 기다리며 분쟁을 획책하고 있다. 1) 도시승려의 이권쟁탈전? 여기서 아주 소박한 다른 입장을 살펴보자. 다음 글은 1998년의 조계사 사태를 바라보며 현대 한국의 선원에서 출가 수행한 경험이 있는 외국인이 쓴 글이다.
저자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년간 송광사에서 비구승으로 참선수행을 한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다. 자신의 경험과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는 종단 분규를 돈과 권력을 둘러싼 ‘추한 싸움’으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또 싸운다’라고 지겹다는 투로 종단 분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각은 로버트 버스웰의 이러한 시각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무소유’를 이야기하고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승가사회가 세속인들도 부끄러워하는 ‘폭력’을 동원한 ‘분규’를 벌인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짧은 글에서 두 가지 주목할 만한 견해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도시승려’라는 개념이다. 아마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승려’라는 개념과 통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두번째로 그는 돈과 권력을 둘러싼 ‘이권쟁탈전’이라는 말로 조계종 사태를 이해했다. 도시승려란 무엇인가? 로버트 버스웰은 참선과 불사에 전념하는, 다시 말해 전통 사찰에 거주하면서 사원 전통에 충실한 승려들과 구별되어 도시에 거주하며 세속적 이해관계에 밀접하게 결합된 일군의 특정 승려를 지칭하는 듯하다.9) 본질이 어찌되었던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것이라고 이해가 된다.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기에는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고, 자신이 배운 바와도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손쉽게 그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은 ‘일부 못된 놈들이’ 사고친다는 해석이다. 마치 율장에서 육군비구들이 온갖 악행과 잘못의 대명사로 지칭되며 부처님의 속을 썩인 것처럼, 지금 한국불교에도 일단의 ‘육군비구’들이 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 의견에 따른다면 종단의 분규에 관계되는 사람은 특정한 무리로서 전통 사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겠지만 실제 분규의 주요 동력은 전통사찰, 그리고 거대 문중에서 출발한다는 데에 현대 한국불교의 고민이 있다. 예를 들어 98년 정상적인 총무원장 선거일정을 계기로 촉발된 조계종 분규의 한 축은 법적 정통성을 대표하는 총무원 집행부와 중앙종회였으며,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정화개혁회의의 구심(실질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 모두)은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는’ 종정이며 통도사의 방장인 월하 스님이라는 점이다. 당시 종정이었던 월하 스님은 종단의 실제적인 권력(재산처분권과 인사권, 구체적으로는 사면복권에 관한 권한 행사)을 요구하며10) 통도사와 말사를 동원하고 분규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까지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분규가 거대화되고 1개월 이상 지속된 배경에는 조계종의 실질적인 세력들인 본사와 문중들이 각기 무리를 지어 대립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도시승려, 이 말이 중앙 종무기관에서 종단의 행정과 정치를 담당하거나 중앙 권력을 지향하는 승려들을 지칭한다면 그들은 특정한 소수가 아니라 사실 모든 종단 소속 구성원들이 대부분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단에 소속된다는 것은 결국 특정 문중과 파벌에 속하며 특정 본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출가와 학인으로서의 공부, 이후 승려생활 전반에 걸쳐) 설사 승려 개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분규가 격화되어 그가 속한 본사와 문중이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저항하기도 어렵다. 특히 그가 본사나 문중에서 말사 주지나 소임을 맡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집단의 전체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즉각적인 불이익을 초래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본사와 문중은 전체에 따르지 않는 개인에게 충분히 불이익을 줄 만큼 강력하다. 또한 그의 견해는 조계종이 지닌 제도적 취약점을 간과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은 사원전통에 근거한 자율적인 전통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법적 제도적 틀을 복합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승가생활상은 현재 조계종을 움직이는 기본 룰이 아닌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승가 전통과 세속법의 ‘조화’가 이루어지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분규는 조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과도기적 혼란상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조계종이 처한 난맥상이 종단으로서의 미성숙인지 아니면 치유될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인지는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 2) 종권 분쟁의 주요 세력 종헌상에 명시된 제도적 권력기구가 종권 행사의 일차적 담당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종정 외에 조계종에는 다음과 같은 종헌기구가 있다. ① 원로회의 ③ 총무원 ④ 교구본사 ⑤ 문중 ⑥ 기타 승가단체 조계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바새, 우바이)로서 구성된다(종헌 제8조).12) 그러나 현재 조계종의 종권을 둘러싼 분쟁의 축은 재가 2부중을 철저히 배제한 출가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출가 2부중 내에서도 비구만의 독점적 경쟁이다. 당장 94년 개혁을 놓고 보더라도 비구니 스님들의 헌신적 참여가 개혁의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실은 온전히 비구 스님들에게만 독점된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버스웰의 시각은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렇게 된 것에는 나름의 역사적 경험이 담겨 있기도 하다. ‘불교 정화운동’ 당시 싸움에 필요한 실제적인 힘은 재가신도들이나 비구니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비구측은 명분에서 앞서고 공권력까지 등에 업었지만 결국 싸움에 필요한 비구승을 무더기로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불교의 가장 큰 물적 토대인 사찰을 확보하는 데는 비구승의 힘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문중과 본사가 여전히 각광받고 있다. 덧붙여 법적 정당성이 필수조건이다. 이 정당성을 판별하는 것은 정치권력이다. 조계종적 현실에서 힘있는 실세들은 관람료 사찰을 차지하고 신도가 없어도 관람료수입만으로 생활할 수 있고, 본사 하나만 잡아도 말사를 통해 공식 비공식 분담금을 넉넉히 확보할 수 있다. 불필요한(?) 재가 2부중과 비구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조계종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주제가 아닐 수 없다. 3) 분쟁의 원인인 이권의 형태 조계종 종단 권력의 핵심은 98년 조계사 사태에서 월하 종정이 요구했듯이 인사권과 재정권이다.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종단의 주요 세력이 합법, 비합법적으로 다투어 온 것이 종권분쟁이다. 합법적, 제도적 차원으로 전개된다면 사실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합법적, 제도적으로 시작된 다툼조차 비합법, 폭력적으로 비화되는데 조계종이 처한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인사에 따르는 갈등의 한 예를 불기협 기사를 통해 살펴보자 조계종은 2월 21일 임시종회를 소집, 동국사태 수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재단의 새 승려 임원후보를 선출했으나, 후보선정 기준이 ▲문중별 안배 ▲재단에 대한 사찰별 재산 출연 자금 다소 여부 ▲ 종단내 실세예우 등인 것으로 밝혀져 종도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날 종회는 예상대로 ‘한 문중에서 많이 차지하면 안 된다’ ‘문중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는가’ ‘동대에 출자 안한 사찰이 어디 있느냐’ ‘원장 스님과 의장 스님은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등의 발언이 속출,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13)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면 표면적인 분쟁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권 나누어먹기’에서 배제된 측의 불만은 내부적으로 쌓이고 곪게 된다. 더구나 주지 인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개인과 세력이 피해를 본다면 불만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그것이 폭발하는 것이 분쟁이고 분규이다. 이권의 큰 줄기는 정화 때부터 이어져온 조계종과 태고종간의 분규사찰이다. 즉 전통사찰로서 명의는 조계종에 등록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태고종측에서 관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이들 사찰을 둘러싼 분쟁은 지금도 간헐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이 문제는 너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이나 문중이 실제 얻어낼 수 있는 영양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는 조계종의 종권 분쟁에서 드러나는 사찰 접수 시도이다. 종권이 바뀌면 새 세력은 구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사찰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획득한다. 서의현 총무원장이 몰락한 후 그의 상좌들이 차지하고 있던 수도권의 사찰들은 힘있는 실세들에게 분배되었다. 또 종단 격변기에 ‘줄을 잘못 선’ 측은 사태가 수습된 후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던 사찰을 ‘줄을 잘 선’ 공신그룹에 힘없이 빼앗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 밖에. 세번째는 일상화된 사찰 접수 기도이다. 즉 종단의 힘있는 실세들이 주인이 없거나 힘이 약한 사찰(그 중에서도 몫이 좋은)을 사적으로 접수하는 시도이다. 현재 조계종과 선학원의 통합 논의가 계속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선학원에 등록된 사설사암들의 향후 생존권에 관련한 우려가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네번째는 각종 이해에 참여하는 길이다. 불기협 기사처럼 종단 관련 몫 좋은 자리에 참여하거나, 혹은 종단내 분쟁의 조정, 사찰 재산의 처분 등에 힘을 발휘함으로써 반대급부를 챙기는 것이다. 권력은 인사와 재정을 통해 고도화되고 재생산된다. 마찬가지로 종권 분쟁 또한 인사와 재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악순환이다. 4) 종권 분쟁의 외인론(外因論) 그러나 종권분쟁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불교 내부의 문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된다. 즉 분쟁의 본질은 비자주적인 종단운영과 정치권력의 ‘간섭’에 기인한다는 시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분쟁의 책임을 불교 외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외인론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은 10·27법난이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국민적 비판시각을 회피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불교를 선택하여 불교계 인사를 대거 연행하고 전국의 사찰에 군인을 투입했다. 그 결과 불교가 비리와 부정부패의 온상인 양 매도당했으며 당시 개운사측과 조계사측의 분규를 종식하고 새롭게 출발한 종단 집행부는 강제 퇴진당했다. 연행조사를 받고 총무원장 사퇴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월주 스님은 94년 종단 개혁 후 총무원장에 당선되자 이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당시 일부 소외세력이 불교계 내부의 문제에 대해 정부에 투서를 보냈지만 이를 빌미로 불교계를 흔들어 놓은 신군부의 처사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서 조사를 받으며 종단의 자주화와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14) 이러한 강도 높은 정권의 간섭만이 아니라 불교 내에서도 평소 종단 내의 권력 지향적 인사들이 주체성을 상실한 채 정권에의 예속을 즐기고 초래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94년 종단 개혁에서 종단의 4대 과제중 하나로 ‘자주화’를 소리 높여 외치기도 했다. 또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분쟁이 발발했을 때 적극적으로 ‘기득권 세력과 정치승려’들을 보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권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앞서 여익구의 글에서도 제기되었듯이 조계종 출범의 전사인 정화기간 동안 정치권력에 기대었던 경험이 이후 정권 예속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시각은 교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 경험 때문에 비자주성이 고착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불교가 정치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현실 때문이다.
유형문화재의 70% 이상이 불교 문화재이며, 불교가 민족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추어볼 때 불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에 대한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과 권리 침해 등의 역기능으로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는 결국 양 주체가 동시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물론 무책임한 양비론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불교계 입장에서는 비자주적 내부 요소를 먼저 척결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망치려는 세력이 내부의 작은 갈등을 증폭시켜 폭력적인 사태로까지 발전시킨다면, ‘공작’과 ‘음해’가 기본적으로 종단에 관철되고 있다면, 공작의 대상, 대리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외인론은 어떤 면에서는 종단의 비자주적 의식이 낳은 사생아인지 모른다. 종권이라는 것은 종교집단이 사회제도에 조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필요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통과 율장만으로 집단이 현대사회에서 존립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종단을 그렇게 놓아두지 않는다. 따라서 중앙집중의 권력이라는 것을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할 수 없으며 조계종이라는 단일 틀 속에서 공동의 이익과 가치를 추구하는 한 분쟁의 원인인 인사와 재정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인사와 재정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를 둘러싼 종권분쟁을 어떻게 종식시키느냐 하는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다. 종권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분쟁의 해결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들의 필연적인 공업(共業)이기 때문이다. 조계종 역사를 통해 종권분쟁이 지속된만큼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시도되었다. 권력의 중심을 이동시키기도 하고, 제도적 보완을 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식적 분쟁 세력이 자꾸만 돌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멀쩡하게 존경받는 인물이 권력의 담당자가 되면서 ‘죽일놈’ 소리를 들어야 하는 악순환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없이는 분쟁 극복이 어려울 것이다. 첫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인적 자원의 자질문제이다. ① 기본적인 관리능력 부재이다. 종단분쟁을 돌이켜보면 종정이 종정답지 못하고, 총무원장이 총무원장답지 못했던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행에 철저하다고 하여서 행정관리능력까지 있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관리능력이 없으니까 관리가 엉망이 되고, 집단과 제도의 룰을 모르니까 제도를 무시하는 파행이 자행되는 것이다. ② 사판 경시의 풍조가 일조를 한다. 종단의 운영과 관리의 중요성에 비해 종단 내부 구성원들은 사판의 일을 경시하고 있다. 중요한 역할은 귀찮다고 피하면서,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소리높여 비난한다. 이런 의식의 틈바구니에서 일부 정치승려들이 활개칠 공간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도된 의식이야말로 종권 분쟁과 부패의 방조자이다. ③ 관념적 초월주의가 문제이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세상사에 무관심한 것이 도통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현세의 과보는 종권분쟁의 악순환으로 되돌아온다. ④ 비자주적 의식이 문제다. 보신주의와도 일맥 상통한다. 일례로 종단의 정체성, 종지와 종풍에 대한 논란은 항상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석상에서 이 문제를 정리해 낼 ‘용기’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내부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 정치권력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해바라기’ 성향이 비자주적 의식의 대표적 모습이다. 자신의 문제에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외부에만 시선을 두는 한 분쟁의 자주적 해결은 요원하다.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제도적 문제이다. ① 봉건적 내부 질서를 꼽을 수 있다.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서열에 의해 중요한 자리를 맡는 내부 질서가 관리운영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심지어는 무능과 부패로 물의를 빚은 사람이 계속해서 중요한 자리에 앉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중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여전하다. 비구니와 재가의 경시도 이러한 봉건적 의식의 연장선에서 나타난다. ② 종단 제도가 승가적 전통과 현대적 법질서를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개인소유제도가 여과 없이 관철되고 있어 대표자 1인의 전횡이 가능해지고 있다. ③ 권력의 분산과 견제장치가 보다 폭넓게 준비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권력의 형성 과정부터가 공개되고 저변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와 입장이 제도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건설되어 있어야 한다. 권력독점을 방지하는 견제장치도 필수적이다. 제도보완의 필요성과 방향에 대한 한 의견을 살펴보자 현실적으로 승가대중을 불신과 패배감의 수렁으로 몰고가는 불화의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법에 의한 원칙과 기준을 시의 적절하게 확립하지 못하고, 그 원칙과 기준이 공평하게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종헌 종법이란 주지하고 정치하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어왔다. 일찍이 한번도 종헌 종법에 의하여 공평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 결정하고 집행하거나, 수행자의 삶을 사는 데 보호를 받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대다수 승가 대중의 종헌 종법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비록 종헌 종법의 제정과 운영에 있어서 승가대중이 다소 소외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종회, 총무원, 주지 등의 문제를 처리할 때 종헌 종법을 공평하고도 성실하게 지키지 않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런 결과 종헌 종법은 총무원, 종회, 주지 자리에나 필요할 뿐, 전체적인 승단운영과 수행자의 생활에 없어선 안되는 계율과 청규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18) 이러한 입장에서 94년 개혁종단은 제도 정비에 총력을 집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제도 보완만으로는 미비하다는 것이 98년의 경험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제도가 아닌 사람이 관건이다. 사람에 대한 희망이 근저에 깔려 있어야 한다. 모든 사업은 사람이 한다. 인적인 문제의 선결과제는 인적청산이지만 권위가 실종된 조계종 상황에서 인적 청산이 실효를 거두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인적 청산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대체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새롭고 건강한 주체의 등장이 요구된다. 새로운 주체는 현재처럼 비구승가 내에서만 충당되어서는 안 된다. 종권 분쟁이 거듭 되풀이됨은 비구승만의 종단 운영 관리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0여 년에 가까운 경험을 통해 분쟁의 악순환과 기존 종단 운영방식의 한계가 확인되었다면 이해와 세력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건강한 구성원을 종단의 운영과 관리에 동참시키는 것 또한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종단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새롭고 건강한 주체의 요구는 비구승가의 종권독점체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 수 있다. 물론 비구는 교단의 정체성을 유지해온 가장 핵심적인 불교 전통이다. 부처님도 비구였다. 그 자체가 교단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종단의 관리와 운영에 대해서조차 독점과 배타성을 인정하기에는 조계종의 현실이 너무 암담하다. 건강한 새 주체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그간 종단권력에서 배제되었던 비구니와 재가 2부중이다. 종단 대의 기구 및 집행부 등 권력구조를 명실상부하게 4부대중이 동등한 권리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19) 그러나 이것은 비구승보다 재가중이 상대적으로 ‘도덕’적이거나 ‘건강’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종단사 속에 나타나는 재가중의 모습은 더 부정적이기도 하다. 재가중에서 보여지는 불건강성의 첫번째는 ‘비겁함’이다. 특히 지식인 그룹의 ‘현상외면’과 ‘비겁함’은 분쟁이 격화될 때마다 두드러진다. 소아병적 ‘몸보신주의’가 탈피되지 않는한 재가중의 책임과 권리를 논하기는 힘들다. 두번째 문제는 ‘브로커’이다. 전문적 지식과 기능을 종단의 각종 이권분쟁, 재산처분에 활용해온 소수 브로커들이 재가를 대표하는 양 나섰고, 많은 물의를 빚었다. 세번째는 ‘발판주의’다. 불교를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인과 명망가들이 반짝 돌출하였다가 금새 사라졌다. 이러한 부정적인 형태를 ‘재가’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스님의 입맛에 맞게 급조되는 상층만의 재가조직이 아니라 지역과 생활 현장에서 건강한 신행을 하는 토대로부터 재가의 대표성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쟁의 제일 원인인 이권 획득의 악순환을 탈피하여야 한다. 더군다나 승리의 관건이 명분이나 신도 대중의 지지도 아닌 원초적 폭력을 동반한 승려의 동원력에 기반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종식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본사와 문중이 순기능적인 역할과 위상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주요 동력으로 평가되고 기능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또한 사원 전통에 뿌리박지 않고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비자주적으로 불교 외적인 강제를 불교계에 이끌어들이는 행동양식에 대한 엄정한 비판이 곁들여져야 한다. 4부대중의 평등한 종권 참여가 조계종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상은 본질을 반영할 뿐이다. 4부중이 참여하는 종단 운영도 현재 한국불교와 구성원들의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대립되는 세력의 어느 한쪽에 볼모로 잡힐 수밖에 없는 기존의 종권분쟁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결국 종권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사부대중의 건강한 열망만이 조계종을 수렁에서 구할 수 있다. 이 고민과 해결이 누구의 몫인가는 자명하다.<끝> 김경호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아동문학가.21세기 전략 아카데미 상임운영위원. 민중불교 운동엽합 기획위원장.개혁회의 홍보과장.조계종 포교연구실 연구과장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불교정보전략 연구실 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의 저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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