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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웅천읍성

아지사리 2010. 3. 24. 11:15

웅천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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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가든에서 바라본 웅천읍성의 위용....

 

 

웅천읍성(도지정기념물 제15호) 성내동, 남문동, 서중동 일대
웅천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16년(1434년)에 처

음으로 축성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의 축조시기에 대한 논의

에서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을 다 같이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세종 17년(1435년)에는 웅천읍성

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읍성조에도 세종 16년에 축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세종실록의

 기사와 부합된다. 그후 단종 1년(1453년)에는 체성을 증축하고 성밖에 해자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7년) 삼도순찰사 박강과 부사 구치관등이 웅천읍성이 협소하여 서쪽에 다시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으며 그뒤 중종 36년(1541년)에는 성을 다시 증축하고 성밖의 민가

 300여호를 성안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웅천읍지의 성지조에 성곽의 둘레가 전혀 변동이 없으므로 이러한 증축이 다 이루어졌다고

는 보기 어렵다. 웅천읍성은 장방형 석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자연대석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동서남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성이다.

 

총길이 936M(현존둘레 500M), 폭 4.5M, 높이 4.4M 이르고 있으며 동벽은 대체로 온전히 남아있으

나 남벽 및 서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고 북벽은 국도를 내면서 파괴되어 기단부만 매

몰되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읍성은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으로 한때 함몰되기도 하였으며 현성으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은

문종 2년(1452년) 웅신현과 완포현, 그리고 천읍부곡을 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부터이다.

 공해는 동헌, 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등이 있으며 문루는

동문의 견륭루, 서문의 수호루, 남문의 진남루, 객사문루인 정해루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둘레(936M), 높이(4.4M), 면적(31120㎡)

웅천 읍성을 지나 산 안쪽으로 들어가면 웅천빙고지가 있다고 하는 데 탐방하지는 못했다.

 

 

웅천빙고지(기념물 제 185호) 웅천동(북부동) 백일마을
북부동 관정 마을에서 백일마을로 오르는 왼편의 빙고등에 조선시대에 축조하여 자연빙을 저장하

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빙고지가 있는데「반구암빙고」라고도 한다. 웅천빙고는 입구와 지붕이 무

너져 내리고 매몰되어 현상을 파악할 수 없으나 내부가 웅덩이처럼 노출되어 있으며 잡목이 무성

하게 자라나 있다. 산허리를 타고 남북으로 뻗은 장방형으로 내벽은 90cm×30cm 정도의 돌로 석

축 하였으나 북벽은 무너져 내렸고 나머지는 매몰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빙실의 규모는 깊이 3m, 폭6m, 길이16m로 폭과 길이의 비율이 1:2.7정도이다. 빙고는 한겨울에 자

연의 얼음을 채집하여 보관하여 두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기 위한 시설이며 외기를 차단하여 얼음

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일반 구조물과는 다른 구조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온도변화가

가장 적은 지반을 이용하되 통기성, 배수처리, 저장과 반출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반 지하 구조로

축조하였으리라 추정된다.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야 규모와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빙고에서 보듯이 축조와 관련된 비석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규 격 : 깊이

 3m, 폭6m, 길이16m)

 

웅천 읍성을 탐방하고 난 후 성흥사 방면이다. 큰 마을을 지나자 용추 폭포 알림판이 나타나면 마

을안길을 따라 들어가면 폭포 입구에 다다른다. 차량을 세워두고 약 500여m 물길 옆으로 난 산길

을 따라 올라가면 용추 폭포의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 가뭄이 계속되는 데도 제법 물줄기

가 굵다. 적벽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는 절벽의 돌을 굴러 떨어뜨려 폭포 아래쪽에는 커다란 돌들이

 모여있다.

전국적으로 용추(龍湫)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 폭포 이름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경남 함양군 안

의면에도 용추 폭포의 이름이, 경북 문경시 가은읍 대야산에도 용추계곡이, 강원도 삼척시 두타산

에도 용추 폭포의 이름이, 충북 영동군 영구사 입구에도 용추 폭포의 이름을 가졌다.

 

용추폭포에서 팔판산과 굴암산을 바라보고 들어서면 성흥사에 닿는다. 예전에는 사역이 꽤나 넓었

을 것인데 지금은 담장을 마련하여 사역을 바깥과 분리하고 있다. 물론 속세와의 번잡함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느낌을 준다.

사역 왼쪽편에는 커다란 노거수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그늘 나무 밑에는 돌을 깔아 놓아 여름철

 더운 철에는 동네 주민이 쉼터로 활용했을 것으로 사려된다.

성흥사 대웅전은 도지정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긴 하였지만 지나친 단청이 옛맛을 오히려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성흥사 대웅전(도지정 유형문화재 152호)대장동 산 180번지
성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원래 신라시대 무염국사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것을 보은하는 뜻으로 구천동 관남리에 지었다고 전해온다. 그뒤 장

유화상이 중건하였으나 잦은 화재로 몇 차례 이건하였는데 창건한지 276년만에 대장동으로 옮겼

고, 다시 322년만에 원래의 구천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종 8년(1667년) 대장동으로, 숙종 39년

 자리를 옮겼고, 정조 13년(1789년)에 비로소 지금의 위치에 이전하였다고 한다.

 


무염국사는 신라의 승려로 무열왕의 8대손인데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이름이 널리 알려져 동방

대보살이라 불리었다. 귀국한 뒤에는 충남 보령의 오합사에 있으면서 성주산문의 개조가 되었는데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 대부분 성자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웅전은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수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잡석으로 기단을 조성하여 자연석의 주춧돌(주초)을 놓아 둥근기둥을 (원주)을 세웠으며, 기둥머

리(주두)에는 창방을 받치고 그 위에 다시 평방을 걸어서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1구씩 더 짜 올린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또한 공포의 장식이 나타나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조선시대후기 사찰 건축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성흥사에는 고종 27년(1890년) 화주스님이 그린 섬세한 필치의 무염국사의 영정과 대불상, 나한

상, 나한종관상, 제석상 등과 당간지주가 있고 사찰의 남서쪽 200M 지점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군이 있다. (자료 진해시청)


 

출처 : 웅천초등학교59회
글쓴이 : 배권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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