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웅천내음

[스크랩] 웅천역사탐방

아지사리 2010. 3. 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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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웅천 왜성, 읍성, 성흥사, 용추폭포 탐방

 

남쪽으로는 바다가 연하여 있고 동북쪽으로는 장복산이 버티고 있어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진해는 군항

도시 답게 들어가는 길은 큰 고갯길 또는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

 

진해터널을 벗어나자 마자 진해항이 눈 앞에 들어온다.
새로운 산업 도로를 따라 진해시청을 지나자 고개를 넘어선다. STX 조선소 방면으로 시량봉수대를 알림판이 나타난다. 최근에 개장한 진해해양공원을 지나도 봉수대 알림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퇴역 군함이 내려다 보는 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사화랑산 봉수대(기념물 제186호) 죽곡 산 103-2, 명동 산 75
사화랑봉수는 경상남도 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에 이르는 제2거의 간봉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연해와 변경의 매봉화대에는 봉화대 근처의 거주인으로 군사 10인과 오장 2인을 임명하여 배치하였다.

 

『웅천읍지』와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사화랑산봉수의 봉수군보는 100명이었다. 명동 뒷산인 사화랑산의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동쪽의 가덕도 천성연대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서쪽 창원 여음포 봉수와 장복산 봉수로 알렸다. 고종 31년(1894년) 8로의 봉수가 폐지될 때 함께 혁파되었다. (자료 진해시청)
 
  진해해양공원을 지나 새로 난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니 바닷길을 매워 수도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난다. 길바닥에 설치한 여러번의 요철을 딛고 수도(섬)에 들어서니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잠시 내려 육지 쪽을 바라보니 시루봉이 또 다시 한 눈에 들어오고 웅천 왜성은 바로 코 앞이다. 하는 수 없이 돌아나올 수 밖에 없다.

 

시루봉에는 여러 번 올랐던 적이 있고 근자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안민고개에서 시작하여 웅산을 거쳐 시루봉까지 이르는 산길은 하루 산행을 족히 잡아야 될 정도로 긴 능선 구간의 연속이다.

시루봉이라는 이름은 시루떡을 찧을 때 쓰는 모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모양이 특이해서 예부터 바닷길의 이정표 구실을 하였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조선 침략시 등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시루봉 봉우리에 우뚝 솟은 거암 시루바위는 시리바위, 웅암, 곰바위, 곰메라고도하며 진해시내에서 바라보면 시루를 얹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진해시민들은 이를 시루바위라고 부르며 이산을 시루봉이라 한다.

 

시루바위는 높이가 10m, 둘레가 50m나 되며, 조선시대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후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백일제를 이 시루바위에서 올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쾌청한 날에는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 이 시루바위에는 조선시대 웅천을 일본에 개항하였을 때  웅천을 내왕하는 통역관을 사랑하게된 기생 아천자가 이 바위에 올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기약없이 떠난 님을 그리워 했다는 애달픈 사랑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한다.
안민고개 방향으로 오르면 시루바위 정상 부근은 초원의 억새밭으로 환상적이며 우뚝선 모습이 장관이다.

 

웅천 왜성 가는 길은 포장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30여분 가까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산길 양켠에는 조그마한 치자 묘목길이 조성되어 있어 그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길이 끝날 즈음에 왜성벽과 마주한다. 반쯤 허물어져 있어 쉽게 성벽을 오를 수 있다. 육지끝 바다에 면한 곳까지 성벽은 뻗어있다. 성루가 있었던 곳은 성벽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만 한다. 성루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이곳은 제법 널찍하고 사위 조망도 뛰어나다.

 

왜성 주변은 사위가 바다 인지라 천연 해자(垓字)의 역할을 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동남쪽 끝으로 나아가면 안골포 왜성까지는 지척이고 멀리 가덕도, 다대포왜성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 웅천읍성쪽으로는 자마왜성이라고 하는 성터도 있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거제도의 구영성 왜성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웅천 왜성의 진입은 예전에는 굉장히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해자 뿐만 아니라 들어오는 성문이 여러번 성벽을 휘돌아 들어설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해안을 따라 18곳을 조성했다고 하는 왜성의 공통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있어 왜성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웅천왜성에서 웅천 초등학교 방면으로 들어오면 웅천읍성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웅천초등학교 동쪽 담장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이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 아마 웅천초등학교터가 웅천읍성의 치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웅천은 조선시대 삼포의 하나로서 대일 무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포 [三浦]
 조선 초기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남동해안의 세 포구(浦口).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鎭海市)에 해당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부산포진은 동래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었으며 1488년(성종 19)에 성을 쌓았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다스렸다.

 

웅천의 제포진은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으며 수군첨사(水軍僉使)가 다스렸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명 있었다. 울산의 염포진은 울산군 남쪽 23리 지점에 있었고 본래 수군만호가 다스렸는데 삼포왜란 뒤에 진을 폐지하였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던 이들 지역을 조선초기부터 다스려 세종 때에는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였다. 그 뒤 부산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하고 왜관(倭館)을 설정하였는데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자료 엠파스 백과사전)

출처 : 웅천초등학교59회
글쓴이 : 배권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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