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삼현 육각을 멈추어라
삼현 육각을 멈추어라
웅천현의 유생들은 지방 차별 때문에 과거에 응시을 해도 낙방을 시켰다. 과거에 급제를 못하는 유생들은 가까운 김해나 함안 등지를 생장지로 하여 응시를 했다.
지방 과거라고 하는 '향시'는 각 도내의 고을을 돌아가며 보이고 있었으나 웅천현만은 제외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끝내 웅천 고을 사람임을 내세워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있었다.
풍호동 '찬샘골'에서 1784 (정조8년)에 태어나 서당과 향교에서 수학한 '홍희지'(洪羲之)는 글이나 말의 재주가 뛰어나 고을 사람들이 장래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지역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떳떳하게 웅천 고을을 내세우고 응시를 하였다. 그렇게 응시하였으나 워낙 문장이 탁월하여 여러 차례 (읍지에는 아홉번이나 하였으나 과장이 아닌가 싶다) 초시 (향시)에는 합격하였다.
그러나, '회시'(會試 : 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치르는 과거, '진사ㆍ생원시'라고 통칭하였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체념을 하겠지만 그는 늙음을 잊고 공부를 하면서 계속 응시를 했다.
마침 1859 (철종 10년)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다. 그 때 나이는 75세였다. 체력으로 보아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상경을 하였다. 과장(科場)에서 시제를 보는 순간 영감이 번득였다. 그는 거침없이 글을 지었다. 생애를 걸고 한 과거 공부를 늘그막에라도 빛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믿었고, 여생은 향토 후진들이나 길러야 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또다시 급제자(합격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지역 차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웅천 고을에 태어난 것이 죄란 말인가? 아이고 아이고......"
폐부를 찌르는 때 아닌 통곡 소리는 시관들의 시선을 모았고, 마침내 왕이 초지를 가져오게 분부하였다. 시권을 본 왕은 "허허! 명필이로고, 중국에는 고지(古之) '왕희지'라 하더니 조선에는 금지(今之) '홍희지'로 구나"하며 감탄하였다.
이래서 그는 합격자의 대열에 올랐고 '사마방목'(司馬傍目 :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음)에는 '웅천'사람 '홍희지'라는 이름 석자가 오늘날까지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합격은 하였으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집에 돌아올 노자가 부족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강원도의 문중에서 어느 부호가 홍진사를 도와 삼현 육각을 앞세운 축하 행렬을 이끌고 이 고장까지 와 주었다.
이 일행이 먼저 당도하여 쉰 곳이 지금의 '대야동'(隊也洞)이었다. 여기에도 말도 쉬고, 악사도 쉬어서 삼현 육각을 멈추게 한 것이다.
'대야동'이란 이때에 이 '무리'(隊)가 여기에서 먼 걸음을 '끝내었다.'(也)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사스러운 급제를 축하하는 도문(到門)잔치'는 자은동의 '암자골'에서 베풀어졌다. 이런 뒤로 "웅천에 나도 지(제)난 탓이라"는 말이 생겼다.
1862년, 78세로 영면하였으며 80세되는 해에 '절충장군 용양 위부호군 겸 오위장'으로 추서되었다.
시집과 문집 '장우가'(藏于家)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재담(才談)을 잘하더 그의 일화가 있어서 참고로 들어볼겠다.
서울로 회시를 보러 가는 어느날 대구의 어느 집에 과객으로 들렀을 때의 일이다. 다른 과객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소생은 '웅천'을 안태본으로 하는 '홍희지'올시다" "하아! 예. '해우창생'(海隅蒼生)이로군요!" (바다 한쪽 구석에 사는 상스러운 백성이란 뜻)하며 한 과객이 그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예! 그러나, '대구'는 '웅천'의 소산인 줄 아옵니다." (웅천 앞바다에서 대구(大口)가 많이 잡히던 때라 이렇게 응수를 하며 내 아들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청도에서 온 한 문객이 "해우 창생인 주제에 너무 거만하지 않소?" 그말이 떨어지자 말자 "'청도'는 '대구 알'(아래)이렷다." 하며 이번에는 이렇게 하대로 응수하여 '내 손자와 같음'을 암시하였다.
듣고 있던 집 주인은 '바닷가 웅천고을'사람이라고 멸시하였다가 재치 있는 응수로 역공을 당하는 두 문객이 안타까와 시비가 되기 전에 만류를 했다.
회시를 치르고 웅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청도 회덕 고을에서 날이 저물어 또 어느 집에 문객으로 들르게 되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문객들이 일제히 "해우창생 반갑소이다." 하며 반기니 사랑지기는 또 부엌으로 가 "해우창생 한 상이오"하고 외쳐 밥 한 상을 더 차리게 알렸다.
'해우창생'이란 말을 처음 듣는 부엌데기들이 무슨 짐승이 들어 온 줄 알고 우루루 나와서 사랑채로 가 문밖에서 수근거리며 문구멍을 내어 '해우창생'을 찾아 보려 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챈 그는 "해우창생 여기 있네"히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